정유재란 (丁酉再亂)

  임진왜란의 2차 전쟁으로 1597년에 다시 일본이 침략한 전쟁이다. 일본은 강화가 결렬되자 1597년(선조 30) 1~2월 14만 1,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침략했다. 명나라도 병부상서 형개(邢)를 총독, 양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총병관 마귀(麻貴)를 제독으로 삼아 5만 5,000명의 원군을 보내왔다. 이때 조선군의 전선 동원병력은 3만 명으로 권율부대를 대구 공산에, 권응수부대를 경주에, 곽재우부대를 창녕에, 이복남(李福男)부대를 나주에, 이시언(李時言)부대를 추풍령에 각각 배치했다. 7월초 일본은 주력군을 재편하여 고바야가와[小早川秀包]를 총사령관으로, 우군은 대장 모리[毛利秀元] 이하 가토·구로다 등으로, 좌군은 대장 우키다 이하 고니시·시마즈[島津義弘] 등으로 편성한 뒤 하삼도를 완전 점령하기 위해서 공격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남해·사천·고성·하동·광양 등을 점령한 후 구례를 거쳐 전병력으로 남원을 총공격했다. 이에 이복남·이춘원·김경로 지휘하의 수성군은 격전을 벌였으나 수의 열세로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후 일본군은 전주에 집결한 후 좌군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약탈을 하고, 우군은 충청도로 북진했다. 9월초 충청방어사 박명현부대는 여산·은진·진산에서 일본군을 공격했고, 이시언부대도 회덕에서 일본 좌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정기룡(鄭起龍)부대는 고령에서, 조종도(趙宗道)부대는 황석산성에서 일본 우군과 치열한 격전을 전개했다. 9월 5~6일 권율·이시언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해생(解生) 지휘하의 명나라 연합군은 직산에서 가토군·구로다군을 대파했다. 이에 일본군은 더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고니시군은 순천, 가토군은 울산으로 후퇴하여 농성했다. 그해 11월 명의 형개가 4만 명의 병력을 3로로 재편하자 조선군도 이시언·성윤문(成允文)·정기룡이 각각 1영(營)씩 지휘하여 남진을 시작했다.

  한편 그해 1월 일본군측의 거짓 정보와 서인 일부의 모함에 의해 정부의 출동명령을 집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순신은 파직당하고 대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4월 조선수군은 조선 연해로 들어오는 일본수군을 중도에서 공격하려다 태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수군의 부산상륙을 허용했다. 이어 일본군이 제해권을 빼앗기 위해 해전에서 맹렬한 공세를 취하자,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6월 안골포전투와 7월 웅포전투, 칠천도전투에서 대패했다. 8월초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한 이순신은 9월 16일 12척의 함선을 이끌고 출동하여 서해로 향하는 300여 척의 일본전선을 명량(鳴梁)에서 대파했다. 이 승리로 일본군의 수륙병진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조선수군은 다시 제해권을 장악했다. 육지와 바다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패주하여 남해안 일대에 몰려 있었다. 그해 12월과 다음해 1월에 걸쳐 울산 도산성에서 권율 지휘하의 조선군은 가토군을 공격했고, 각 지역에서 일본군 잔당들을 섬멸했다. 그리고 이순신 지휘하의 수군도 절이도와 고금도에서 일본 수군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1598년 8월 마침내 도요토미가 죽자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고, 이에 조선군은 마귀·유정(劉綎)·동일원(董一元) 등이 지휘하는 명군과 함께 육상에서 일본군을 추격했으나, 명군의 유정이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고 명군을 철수시킴으로써 일본군을 섬멸하지 못했다. 한편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진린(陳璘) 지휘하의 명 수군과 함께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11월 노량(露梁)에서 일본전선 300여 척과 해전을 벌였다. 그결과 조선과 명이 일본의 함선을 200여 척이나 격침시키는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순신은 전사하고 말았다. 이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일본과의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브리태니커백과사전> <http://deluxe.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18a1824b>
[2003. 4. 7자 기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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